2월 초, 예년이라면 한참 칼바람이 불어닥쳐야 하겠지만 요새 날씨는 '지금이 겨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따듯하고 화사하다.
동장군이 몸을 얼려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야 뜨끈한 집안에서 맥주나 와인을 홀짝거리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게 약속없는, 한가한 주말 시간을 보내는 상책이겠지만 이런 날씨에야 뭔들 하고 싶지 않을까
1월의 마지막날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진행중인 '서양미술거장전'을 찾은 것도 이런 생각에서다.
마침 그날은 오전 열한시 반에 양재동 온누리교회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기도 했다. 예식이 끝나고 거기서 점심까지 배불리 먹어 봤자 기껏 두어시간 남짓일텐데, 곧바로 그냥 집에 털래털래 들어가는 건 차도 없이 거기까지 움직인 무거운 몸에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근래 주변 사람이나 몇몇 뉴스를 통해 괜찮은 그림이 많이 왔다는 얘기를 들은지라 근래 영화 말고 그다지 별다른 문화생활을 하지 못한 나로서는 회가 한창 동하던 참이기도 했다. 또 미술관이란 데가 정말 특별하게 취향이 맞지 않은 다음에야 누구는 더 보고 싶은데 누구는 나가자고 하는 등 서로 불편한 상황만 초래하기가 일쑤니... 만날 사람도 없이 오후에 양재동에 덜렁 떨어진 나에게 예당 한가람미술관은 그야말로 방문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토요일 오후 한시반께 찾은 서양미술거장전은....서양 유명 화가의 그림을 가져온 전시가 대개 그렇듯이 아주 번잡스러웠다. 외부 매표소에서 표를 살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3층으로 올라가 오디오 가이드를 신청하는 줄이 조금 늘어지는 듯 싶더니
전시실로 들어가자 시장바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장스럽지만 조용하고 여유있게 그림을 즐기기엔 상당히 많은 애로사항이 발생할 풍경이 펼쳐졌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어느정도 신경이 쓰였고 순서대로 그림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그림 가까이를 따라 이동하는 줄 때문에 좀 떨어져서 그림을 보기엔 시야에 장애물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었다.
주말, 더구나 오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화생활을 즐길만한 곳이 그다지 많지 않은 우리나라 상황인데다 교과서나 영화, 책으로 본 서양 명화를 우리나라에서 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 문화생활에 관심있는 직장인이나 연인, 아이들에게 문화생활의 묘미를 가르쳐 주고 싶은 부모들이 미술관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편한 시간이 그때쯤 말고 찾기 쉽지 않을 터다.
하지만 매번 한가람미술관을 갈 때마다 미술관 측의 운영 스킬에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더 전시 공간을 넓게 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도 렘브란트의 에칭 수십점까지 까지 합하면 거의 100개에 가까운 작품을 전시한 것 같은데 대개의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그림 감상에 불편함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나 에칭은 작품이 상당히 작은데다 세밀해서 자세히 보려면 거의 코앞까지 접근할 수 밖에 없는데... 겨우 몇센치 떨어진 그림마다 사람들이 붙어 있으니 혼잡스러울 건 당연했다. 습도, 온도조절때문에 임시공간을 마련하기 힘든 미술 전시회지만 사람들이 많이 올 만한 특별한 전시회라면 다른 층까지 활용하는 걸 고려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들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많은 것들이 '오 이것까지 왔던가?' 하는 느낌이다. 대부분이 마음에 들었지만 너무 좋았던 것 몇개만 꼽아보자면...

<Francois Boucher, 헤라클레스와 옴팔레 Heracules and Omphale>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나이든 여인의 초상>

<브뤼헐, 4계절 연작 중 '겨울'>

<페테르 파울 폰 루벤스, 성 도미니크에게 묵주를 주는 마리아>
아, 그리고 몇점 전시된 바니타스화에도 눈길이 갔다. 바니타스화는 정물화이지만 그림의 대상을 통해 인생에서 죽음의 불가피성, 속세의 영광과 쾌락의 무의미함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아주 싱싱한 과일이나 어패류 등을 그리되 삶의 생기가 한순간에 불과함을 암시하거나 해골로 죽음을 말하는 그림들이다.

<얀 다비츠존 더 헤임,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

<Pieter van der Willigen, Allegory of the Frailty>
점점 사람이 늘어나는 가운데에서도 나름 여유있게, 열심히 그림을 보다 보니 두어시간이 금방 흘렀다. 사람이 그렇게 많고 시끄러워지지만 않았다면 허리하고 다리가 아프더라도 한두바퀴 더 둘러봤을거다.
결론은... 번잡스러웠고 번잡스러움이 점점 더해갔지만 그걸 견딜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 2월 26일까지 한다는데 그 전에 한번 더 가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월 2일부터 한가람미술관에서 클림트전이 시작되는데 클림트전 간김에 그것도 한번 더 보고 나오던가...
다음엔 꼭 10시 개관에 맞춰서 가야겠다.
# 1 오디오 가이드.. 3000원 내고 빌리는건데 그 값을 하는건지 안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설명하는 그림 자체도 그다지 많지 않고 내용도 좀 짧은 듯한 느낌?
# 2. 전시장 출구서 파는 기념품은 항상 그러하듯이 별게 없다. 열서너종 정도 되는 엽서는 나름 마음에 들더만.. 엽서 종류나 더 늘렸으면 좋겠다.
Posted by wookso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