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 그림이 훼손됐다? 별일 아니길 바랄뿐-루벤스, 바로크 걸작전
 
 2003년 어느 초가을날 아침, 초짜 배낭여행자였던 나는 벨기에 안트베르펜(Antwerpen) 노틀담 성당 앞에 서 있었다. 벨기에를 방문한 많은 한국 배낭여행객이 대부분 브뤼셀만 거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굳이 그곳에 간 건 바로 단 하나의 이름 때문이었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

 그림에는 스스로 조예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벨기에에 도착하기 전까지 몇 미술관을 들르면서 난 이미 루벤스의 열혈팬이 되어 있었다. 그 화려한 색감과 힘이 넘치는 구성이라니. 그가 천재 화가이기 이전에 외교관으로도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도 천성적으로 다재다능한 사람을 흠모하는 내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루벤스란 이름은 안트베르펜이란 도시명과 함께 이미 어릴적부터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TV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그렇게 보고싶어하던 그림이 바로 안트베르펜 노틀담 성당의 루벤스 그림 아니던가.
 사소한 거라도 한번 필이 꽂히면 뭐가 됐건 한번은 꼭 해보는 게 나란 사람이다. 배낭여행을 결심할 때부터 이 성당에 있다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고 돌아오리라 마음먹었었다.

 약간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거대한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날씨는 눈이 아플정도로 화창했지만 아침 나절인지라 쌀쌀한 성당 안엔 기도하는 몇 외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 싫어 나름대로 살금살금 가운데로 걸어가던 도중 정말 '헉'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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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ens, assumption of Virgin>


 이런 그림을 보고 무슨 말이 나오겠나. 처음엔 아무 생각도 안들었던 것 같다. 카톨릭 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신앙과 관련된 감동이 크진 않았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엔 정말 한계가 없구나'라고 나중에 수첩같은 것에 끄적거렸던 게 기억난다.
 근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정말 진짜는 중앙 제단 좌우에 있는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였다. 특히 한동안 앉아서 넋을 잃고 봤던 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다. 미술에 대해선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었음에도 '루벤스 최고 작품 중 하나'라고 불리는 게 이해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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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ens, Descent from the Cross>


 이날 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앞으로 여행 중에 루벤스 그림이 있는 데는 무조건 가야겠다.' 이후 거진 90일간의 여행 중 이것 때문에 후회한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난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중인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을 보러 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비록 배낭여행은 끝났지만 루벤스는 절대로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전시회는 나름 신경써서 준비를 하고 갔었기 때문인지 아주 만족스러웠다. 준비란게 별 게 아니고 열한시에 시작하는 도슨트 설명에 맞춰서 간 것 뿐이다. 도슨트가 전체적으로 교육을 잘 받은건지, 그날 투어를 진행한 도슨트가 특별히 훌륭한 건지 모르겠지만 거의 한시간 가량 진행된 투어 동안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라던가 개별 그림들의 의미에 대해서 아주 알찬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전시장이 꽤 널찍해서 한가람미술전에서 진행중인 렘브란트전보다 훨씬 쾌적하게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끄럽지 않게, 여유있게 돌아다니면서 감상하기엔 충분했다.

  전시된 그림에 대해 말하자면... 반다이크, 루이스달, 오스타테, 마에스 같은 화가들도 좋았지만 역시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루벤스였다.
 '삼미신', '파리스의 심판', '바커넬', '세레스와 바쿠스가 없으면 비너스는 추위에 떤다' 같은 완성작품 외에도 여러 천장화의 스케치도 함께 와서 볼거리가 꽤 많았다. 사실 루벤스 이름만 빌리기 위해 많아야 서너점 온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처음엔 있었는데 말 그대로 기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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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ens, Bac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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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ens, Judgement of Paris>


 이번 전시회의 여러 루벤스 작품 중에서도 하나를 꼽으라 하면.. 당연히 이 작품이다. '오레이티아를 납치하는 보레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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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ens, Boreas Abducting Oreithyia>


 아틀리에라는 시스템을 적극 활용해 거의 3000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긴 루벤스지만 이 그림은 본인이 손수 스케치부터 완성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루벤스 그림은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뭔가 꽉 차 있으면서도 전혀 번잡스럽지가 않다. 역동적인 구성이 정말 '바로크'라는 말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저 피부색은 정말 환상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피부에 저렇게 약간씩 푸른빛을 덧칠함으로써 질감과 명암을 강조하는 게 루벤스만의 특기인데.... 섣부르게 따라하려고 하면 사람이 멍투성이가 되고 만다고 한다.

 도슨트 설명을 듣고 나서도 다시 보고 싶은 걸 또보고 또보고 하다보니 세시간이 훌쩍 지났다. 슬슬 허리와 다리가 한계라고 아우성친다. 출구쯤에 있는 기념품 가게서 엽서를 고르고 있는데,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라? 온다고 한 것중에 못본 그림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서 읽었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번 전시회에 분명히 루벤스의 수유하는 '암호랑이(Feeding Tigress)'가 온다는게 머릿속에 확실히 들어 있었다. 내가 정신이 딴데 팔려서 못본건 아닌가 싶어 나온 길을 되짚어 다시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전시장 전체를 다시 훑어 봤지만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때마침 눈에 들어온 전시장 스태프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요.. 이번에 루벤스 수유하는 암호랑이도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전시장에 없는 것 같은데요..."
 스태프의 대답에 살짝 놀랐다. "아 그 그림은요, 이번에 왔는데 전시중에 훼손이 되어서 전시 품목에서 뺐구요, 빈 아카데미 뮤지엄에 연락을 해 놓은 상황입니다."
 "훼손됐다구요? 그럼 이 전시회 끝날 때까지 다시 볼 수 없는 건가요? 아님 다시 전시하면 홈페이지 같은 걸로 알려 주나요?"
 "지금 빈 아카데미 뮤지엄에 연락을 해 놓은 상황이라 전시가 그때까지 다시 될 지는 정확하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아 이런.... 스태프의  말에 많이 낙담했다. 루벤스의 동물 그림을 다시 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도 꽤 컸었으니까. 지금까지 한두작품 밖에 못 본 것 같지만 표현력이 뛰어난 그인지라 동물 그림이 굉장히 섬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쉬웠지만 훼손이 돼서 지금 전시하지 않는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결국 암호랑이 그림은 못 본채 집으로 돌아왔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걱정도 된다. 많이 훼손된 건 아닌지.. 혹시 복원이 힘든 건 아닌지... 그림이 훼손된 것 자체만도 큰일이겠지만, 혹여 우리나라 미술관의 대여품 관리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까봐도 걱정이다. 한국에 오는 좋은 작품이 줄어들 수도 있는 거니까.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모쪼록 별일 아니기를, 그저 한번의 해프닝이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그림 하나는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만족도가 컸다. 도슨트의 설명도 좋았고 여유있는 분위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정도 전시회라면 입장료가 오히려 싸다는 생각이다.
 사실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이런 전시회는 정말 가뭄에 단비같은 존재일거다. 직장인들은 소소한 전시회나 공연 정도야 부담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음에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맘에 드는 콘텐츠를 찾기가 쉽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이번 전시회는 3월 말까지 하는 모양이다. 혹시라도 그때까지 주말에 이 근처에 갈 일이 있으면 한번 더 봐야지.

P.S 사실 이번에 온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은 스케치 작품이고 완성품은 아니다. 루벤스는 파리스의 심판을 주제로 상당히 여러 작품을 남겼다. 사람들 머릿속에 많이 남아 있는건 아마 다음 작품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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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ens, Judgement of Paris>


p.s. 2 이 포스팅에 사용된 이미지의 대부분은 Wikipedia에서 가져온 것이다. 저작권 부분에 대해선 루벤스가 1640년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모두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수 있는 '공공 영역(Public Domain)'에 속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저작권 부분에 대해 혹시라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누구라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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