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언제부터 유럽 여행을 생각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행이라는 게 뭔지 몰랐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유럽’이라는 그 매력적인 이름이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당시로선 꽤 많았던 독서량이 거기에 한몫 단단히 했을 게다.
부모님이 모두 직장을 다니시는 상황에서 난 당연히 혼자 놀 때가 많았다. 장안동에 살던 무렵 유치원 다니기 전엔 작은이모가 누나랑 나를 봐주시거나 가정부 아주머니가 어머니가 퇴근하시기 전까지 집에 있어주곤 했다. 허나 그것도 유치원 다닐 때쯤 까지였다. 잠실로 이사온 이후 운동이나 밖에서 땀을 흘리며 노는 것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있는 책을 잔뜩 꺼내놓고 읽는 게 일과였다.
당시 책을 읽을 땐 주제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사진집, 역사, 과학… 온갖 책들을 밥 먹을 때조차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세로로 씌어진 누런 색 옛날 책도 내용도 모르면서 손을 꽤 댔던 것 같다. 덕분에 지금이야 별로 티가 나지 않지만 중학생, 고등학생 때는 말투, 단어가 꽤나 문어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야 담임이 열받았나봐.” 대신 “담임의 분기탱천이 실로 굉장한걸.”이란 말을 써서 친구들이 ‘욱순어 사전’이라는 것도 만들 정도였으니까.
네덜란드의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의 상징은 사자 가죽과 몽둥이다.
여하튼 그때 읽었던 책 중에서 특히 내 마음에 들었던 게 그리스․로마 신화였다. 그중에서 특히나 제우스, 헤라클레스, 트로이의 목마, 시지프스의 이야기가 맘에 들었다. 제우스는 벼락을 마음대로 다루는 올림포스 열두 신의 대장이라는 점에서, 헤라클레스는 나중에는 신이 되는, 불가능한 과제를 수행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나이라는 점이 정말 좋았다. 트로이의 목마 얘기는 영웅들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와 목마 잠입의 긴박감을 느끼려고 몇 번 씩이나 읽었다. 시지프스 이야기는 신을 속인 죄로 영원히 산꼭대기로 돌을 굴려올려야 한다는 것을 약간은 무섭게 생각하면서 귀신이야기 읽듯이 읽었던 게 기억난다. 이렇게 좋아하는 이야기의 무대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게다가 한 TV 프로그램이 내 유럽에 대한 환상에 불을 지르고 말았으니 그게 바로 80년대 중반부터 일요일 오후에 방송된 MBC의 ‘퀴즈 아카데미’였다. 수많은 히트작을 낸 주철환 전 MBC PD의 첫 기획이자 연출 작품이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대학생 두명으로 이뤄진 4개 팀이 등장해 시사, 교양,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퀴즈대결을 펼쳐 한 팀을 뽑고 그 팀이 전주 우승팀과 진검승부를 펼쳐 최종 우승팀을 갈랐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멋진 대학생들이었다. 나야 초등학생이었으니 당연히 알 턱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왜 그리 쉽게 턱턱 대답하던지…. 팀 이름도 환상이었다. ‘독수리 창공을 날다’, ‘경부고속도로’, ‘아Q정전’, ‘청마’ 그 이름들이 왜 이렇게 멋지던지….
나만 좋아했던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꽤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 에피소드도 기억난다. 퀴즈 아카데미엔 몇 문제를 출제해 주는 초청 연예인도 매주 나왔는데 가수 이범학이 나왔을 때 출전 대학생들까지 통째로 속여먹었다.^^ 중학교 1학년 교과서 수준 영어를 읽어주고 해석을 하라지 않나, GNP를 설명하면서 ‘그럼 새발의 피는 무슨 뜻인가요?’ 하고 묻질 않나… (출연자도 무슨 상황인지 몰라 한참 머뭇거리다가 한 팀이 조심스럽게 부저를 누르고 ‘아주 적은 양…’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아주 배를 잡고 웃었다.)
90일간 배낭 안에서 고이 잠자준 비행기 티켓
어쨌든 그 멋진 대학생들이 자그마치 7주 연속으로 우승하면 받게 되는 상품이 바로 한달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80년대 중반에나 된 지라 해외여행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배낭여행은 더더욱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정말 꿈의 실현과도 같았다. 퀴즈 아카데미를 보면서 난 결심했다. ‘우와, 저렇게 멋진 학생들이 가는 게 유럽 배낭여행이구나, 나도 꼭 유럽여행을 가는 멋진 대학생이 되겠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내 결심이 좀 엉뚱했다. 대개는 ‘우와 저렇게 똑똑한 학생들이 가는 게 유럽 배낭여행이구나.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똑똑하고 멋진 대학생이 되야지.’ 할 텐데 말이다. ‘똑똑하고 멋진 대학생==>유럽여행가는 대학생’이 아니라 ‘유럽여행가는 대학생==>똑똑하고 멋진 대학생’이라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거꾸로 되긴 했는데… 어쨌든 어릴 적 그런 식으로 유럽여행에 대한 굳은 결심을 하게 됐다.
Posted by wooksoon



